제안 분야: 산업
서남권의 문제는 산업자원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산업이 투자 결정을 내릴 만큼 큰 ‘확정된 시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목포에는 친환경선박 연구·시험·실증 인프라가 들어서고 있고, 영암 대불산단에는 실제 친환경 선박 제조기업과 조선 생산기반이 존재합니다.[1][2] 그러나 연구개발, 실증, 지자체의 구매수요, 관광사업, 항만·교통 인프라가 각각 별도의 사업으로 움직이면 기업 입장에서는 다음 주문이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설을 먼저 짓고 기업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서남권 시·군이 앞으로 반드시 구매하거나 이용해야 할 수요를 먼저 모아 ‘미래 매출’을 보여주는 것에서 산업정책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슷한 시설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생산능력과 연구능력 앞에 권역 전체의 구매시장을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 출발점을 ‘서남권 친환경 공공선박 공동수요계약’으로 제안합니다. 목포·무안·신안·영암·해남·진도·완도 등 서남권 시·군이 앞으로 5년 동안 교체하거나 새로 확보해야 할 행정선, 어업지도선, 도서 연결선, 관광·체험선, 연구·실증선 등의 수요를 각자 발주하기 전에 먼저 한 장의 공동수요표로 만듭니다. 여기서 핵심은 여러 지자체가 똑같은 배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체·전기추진·충전·관제처럼 반복되는 기반규격은 공동화하고, 어업지도·관광·환경감시·도서교통처럼 지역마다 다른 임무는 모듈로 나눕니다. 그러면 기업에게는 ‘한 척짜리 시범사업’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질 제품군 시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지자체의 예산으로는 새로운 생산라인을 만들기 어려워도 여러 시·군의 예정수요가 하나의 계약 파이프라인으로 묶이면 기업은 인력과 설비, 부품망에 투자할 근거를 갖습니다. 해외에서도 여러 공공구매자의 장기수요를 묶는 구매자 네트워크가 단순한 가격절감을 넘어 신규 프로젝트와 지역 공급망 투자를 유도하는 방법으로 연구돼 왔습니다.[3] 서남권은 기업을 보조금으로 데려오는 대신, 기업이 투자할 이유가 되는 첫 시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수요만 모은다고 지역 간 경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박은 영암에서 건조되고 시험은 목포에서 하며, 신안이 실증항로를 제공하고 다른 시·군이 구매자가 된다면 각 지역은 다시 “결국 어느 지역이 가장 많이 가져갔느냐”를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수요계약의 뒤에 ‘서남권 상호성과계정’을 붙입니다. 이는 돈을 한데 모아 균등하게 나누는 기금이 아닙니다. 각 공동산업 프로젝트마다 누가 시장을 만들었고, 누가 자원을 제공했으며, 누가 부담을 감수했고, 그 결과 어디에서 어떤 성과가 발생했는지를 처음 계약할 때부터 기록하고 사업 이후 다시 정산하는 공동성과 원장입니다. 시·군이 약정한 구매량은 ‘수요 기여’, 시험장·부두·항로·충전시설 제공은 ‘인프라 기여’, 실제 지역기업 발주액·고용·교육훈련·민간투자·후속계약은 ‘발생 성과’로 남깁니다. 사업의 주소는 한 곳일 수 있지만, 사업을 만든 원인은 여러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계정에 남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상호성과계정은 기존의 성과공유기금이나 세수공유제와 출발점이 다릅니다. 기존 방식이 시설이나 기업의 입지 이후 발생한 성과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이 제도는 성과가 생기기 전에 각 지역이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 먼저 약정하고, 그 약속이 실제 산업성과로 얼마나 전환됐는지를 이후에 대조합니다. 즉 '투자 → 성과 → 배분'이 아니라 '공동수요 → 사전약정 → 민간투자 → 실제성과 → 후속권리'의 순서입니다. 미국 오하이오의 Joint Economic Development District처럼 지방정부들이 경제개발에 앞서 서비스·재산·시설 등의 기여와 비용·수익배분을 계약으로 정하는 제도는 이미 존재합니다.[4] 그러나 서남권 상호성과계정은 여기에 ‘공공수요 자체를 하나의 산업시장으로 만드는 공동수요계약’을 앞단에 결합합니다. 성과를 나누는 제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성과가 발생할 시장부터 함께 만드는 구조입니다.
상호성과계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를 나눠주는 것보다 다음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안이 친환경선박의 구매수요와 실증항로를 제공하고, 목포가 시험평가 인프라를 제공하며, 영암에서 실제 생산과 고용이 발생했다면 어느 지역도 다른 지역의 성과를 자기 손실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공동수요계약을 설계할 때 앞선 사업의 수요 제공량, 인프라 활용, 실제 기업투자와 고용성과가 그대로 남아 후속 프로젝트와 공동 인프라 투자의 판단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역 간 협력을 선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협력한 기록이 다음 사업의 권리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름만 올리고 실제 수요나 자원을 제공하지 않은 지역까지 동일한 몫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함께하자’는 선언을 반복하는 대신 참여와 성과가 다음 기회로 이어지는 반복 가능한 산업계약으로 바꿉니다.
이 방식은 친환경선박 한 분야에서 검증한 뒤 다른 산업수요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업을 많이 묶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진 작은 수요 →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하나의 시장 → 시장을 만든 지역의 기여와 실제 성과 기록 → 다음 공동사업으로 환류’라는 동일한 엔진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OECD도 공공수요가 여러 기관에 분절되면 혁신을 끌어낼 규모가 작아지고, 반대로 수요를 조정·집중하면 공급자의 상업적 위험을 줄이고 생산 확대와 혁신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5] 또한 현행 지방계약제도에는 시·도지사가 관할 시·군·구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물품에 대해 ‘제3자를 위한 단가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 여러 기초지자체의 공통수요를 묶는 발상 자체가 전혀 새로운 법체계를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6] 실제 적용 시에는 선박과 같은 개별 계약의 성격에 맞춰 구체적인 계약방식을 별도로 설계하면 됩니다.
결국 이 제안은 서남권에 무엇을 하나 더 지어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서남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공공수요를 하나의 ‘산업자산’으로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지금까지 지방정부가 기업에게 부지와 보조금, 세제혜택을 먼저 제시한 뒤 투자를 기다렸다면 공동수요계약은 방향을 뒤집습니다. 기업에게 “여기 오면 지원하겠다”고 말하는 대신 “앞으로 구매할 시장이 이미 여기 있다”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상호성과계정은 그 시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지역이 제공한 수요·자원·인프라·부담과 실제로 발생한 산업성과를 연결해, 특정 시설의 주소만으로 전체 성과가 한 지역의 몫이 되지 않도록 합니다.
서남권 상호성과계정의 목적은 성과를 공평하게 잘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수요가 서로의 산업을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시설을 어디에 놓을지를 경쟁하는 지역발전에서, 누가 더 큰 시장을 함께 만들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지역발전으로 전환합니다. 서남권의 개별 시·군은 기업에게 작은 시장일 수 있지만 서로의 미래수요를 계약으로 연결하는 순간 하나의 산업시장이 됩니다. 각 지역의 약점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존재해 시장이 되지 못했던 수요를 합칩니다. 이것이 「공동수요계약 기반 서남권 상호성과계정」의 출발점입니다.
출처
[1] News in 전남, 「목포 친환경선박 산업 클러스터 조성 협약」, 2026.03.01.
https://www.newsinj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369
[2] 뉴스워커, 「영암군, 대불산단 친환경 선박 기업과 40억 원 규모 여객선 건조 나서」, 2025.11.11.
http://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2057
[3] Clean Energy States Alliance, Collaborative Procurement of Offshore Wind Energy: A Buyers Network – Assessment of Merits and Approaches.
https://www.cesa.org/wp-content/uploads/OWAP-Collaborative-Procurement-Report-September-2012.pdf
[4] Ohio Revised Code §715.72, Joint Economic Development District.
https://codes.ohio.gov/ohio-revised-code/section-715.72
[5] OECD, Public Procurement for Public Sector Innovation: Facilitating Innovators’ Access to Innovation Procurement, 2024.
https://www.oecd.org/content/dam/oecd/en/publications/reports/2024/12/public-procurement-for-public-sector-innovation_93d920fc/9aad76b7-en.pdf
[6]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80조, 제3자를 위한 단가계약, 2026.06.03 시행.
https://govbrief.kr/scan/01009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