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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광주통합특별시(구)광주광역시

철기시대

광주지방에 국가 단위의 사회가 발생한 시기는 철기시대로 여겨진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魏誌 東夷傳 韓條)에 의하면, 마한지역 중 광주와 관련하여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시 일대로 보고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 반남면 덕산리·대안리·신촌리와 다시면 복암리 등에 소재한 50여 기 이상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시 일대로 추정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보이는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 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된 우치동·송암동·서창동 등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철기시대의 각국 인구수는 약 5천~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상한연대는 지석묘 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기원 전후가 되며, 하한연대는 백제 근초고왕 때 마한 잔여 세력을 토벌한 기사로 보아 기원후 4세기 후반이 된다.
하지만 중국 양직공도와 고고학 자료 등에 기반을 둔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라, 마한 사회는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성립하여 기원후 6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삼국시대

백제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남하한 유이민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점차 주변 부족국들을 통합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인 백제국(百濟國)에서 일어났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다. 전남지역의 군현은 중·동·남·서·북 오방 중 하나인 남장 구화하성(久和下城 : 장성·구례의 2가지 설)에 속하였고, 이 무렵 광주지역은 무진주(武珍州)로 직할 3현인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 나주 남평읍), 복룡현(伏龍縣 : 광산구 용동·지죽동 및 나주 동강면·노안면), 굴지현(屈支縣 : 담양 창평면)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한 거점이 된 무진(武珍 : 광주), 발라(發羅 : 나주), 월내(月奈 : 영암)는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에서, 무진은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남북국시대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4)의 일이며, 이때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한주에 중원경, 삭주에 북원경, 웅주에 서원경, 전주에 남원경의 5경을 두었는데, 이 당시 전남지역은 남원경에 속한 무주(武州)이며 15군 32현을 관할하였다.
광주가 무주라고 기록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 및 신라의 옛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라고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문왕 6년(686)에 그 명칭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核)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미드형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혜공왕 12년(776)에는 경덕왕 때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예전처럼 복구되어 지방 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통일신라기에 무주·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는 것을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무주는 근처 3현인 현웅현(玄雄縣 : 나주 남평읍), 용산현(龍山縣 : 광산구 복룡동), 기양현(祁陽縣 : 담양 창평면)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 지방 행정구역 단위는 촌(村)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농업이 주업인 대략 10호가량의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군사 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시위부(侍衛府)와 9서당(九誓幢)의 중앙군 이외에도 5주서(五州誓) 및 삼변수(三邊守),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10정(十停)은 곧 지방군을 뜻하며 여기서 정(停)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 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10정 중 하나가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현웅현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흑색금(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미다부리정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후삼국시대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방수비장(防守婢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를 점거하고 부근 군현을 빼앗아 완산주(전주)에 진군하여 도읍을 삼고 후백제왕이라 칭했다.
그때 북방의 궁예도 강원지역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송악(松岳 : 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한 후 혜공왕 5년(769)에 후고구려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당시 궁예에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과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게 귀부시키고 해상을 통해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錦城郡 : 나주) 등 10여 군을 공략 후 나주에 진을 쳤다.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패(霸)를 겨루었다.

고려시대

고려 태조 19년(936)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며 후삼국이 통일되었다. 태조 23년(940)에 무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동시에 도독부를 두었다.
그 후 성종 14년(995)에 관제 개혁이 있었는데, 전국을 3경 4도호부 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海陽道)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安南, 朗州 : 영암)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승주(昇州 : 순천)에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潭州 : 담양)·패주(貝州 : 보성)·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에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제도(諸道)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을 두었다.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연대는 미상이나 그 후 주(州)로 승격되었다가 26대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강등되어 화평부(和平府)가 되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주에는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그 후 공민왕 11년(1362)에 다시 이름을 바꿔 무진부(茂珍府)라 했다가 공민왕 22년(1373)에 광주목(光州牧)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는 좌도·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해 있었다. 세종 12년(1430)에 읍인(邑人)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했다는 죄과로 목(牧)을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이라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문종 1년(1451)에 다시 복칭되었다가 성종 20년(1489)에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되고 연산군 7년(1501)에 복구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인조·숙종 대에도 이와 비슷하게 불미스러운 일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사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에 따라 광주에 읍장을 두었는데, 당시의 광주는 성벽 안을 성내면이라 했고 성 밖에 기례방·공수방·부동방의 3방이 있었기 때문에 1면 3방을 합병하여 광주면(光州面)이라 호칭하였다.
1931년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광주읍(光州邑)으로 승격시켰다가 1935년에 다시 광주부(光州府)로 고쳤다. 이때 행정구역은 41개 정(町)으로 확장되었다.

대한민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자 주둔한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1947년 6월에 군정청이 폐지되고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광주부는 1949년에 광주시(光州市)로 바뀌면서 2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이 있었다.
1963년에 서창·대촌 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 관할 구역은 214.92㎢로 좁아지고 45동 6출장소가 되었다. 1966년에는 계림1구·월산동·효죽동의 3개 동을 분동하여 48개 동으로 늘렸고, 1970년에 다시 산수2동·서석2동·학3동 등 10개 동을 분동하여 모두 58개 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 인구는 502,000명 정도였다. 1973년에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 구제(區制)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980년에는 석곡·지산의 2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를 신설하여 3개 구로 운영하다가, 1986년에 부산·대구·인천에 이어 광주직할시(光州直轄市)로 승격되었다. 이때만 해도 3구 72동으로 행정구역 면적은 215.11㎢에 불과했으나, 1988년에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편입됨으로써 면적은 501.44㎢로 크게 늘어나고 광산구를 신설하여 4구 83동 9출장소를 관할하는 서남권 중추관리기능도시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1년에 지방자치제 시행으로 주민자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광주직할시의 명칭이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로 변경되었고, 같은 해 서구를 분구해 남구가 설치되면서 동구·서구·북구·광산구·남구 등 5개 구가 되었다.
2025년 4월 말 기준, 현재 5개 자치구에 96개 행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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